[묵상할 말씀]
마가복음 10장 46절 ~ 52절
[요절]
50 : 그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예수께로 왔다.
[묵상]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직전에 여리고를 들리셨다.
여리고는 여호수아가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무너뜨린 성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여리고에 갔다가 예루살렘으로 떠날 무렵 수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른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먹을 것과 병고침을 구하기 위해 모였으며, 성경에 등장하는 메시아라면 더더욱 자신의 구원을 위해 눈도장을 찍어야 했으므로 더욱 많이 모였을 것이다.
여리고성을 떠날때 예수께서는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소경의 눈을 고쳐주시는 은혜를 베푸셨다.
'바디매오'란 뜻은 '디매오의 아들'이란 뜻이다.
'디매오'는 '불결'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타메'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래서 '바디매오'는 '불결한 자의 아들'이란 의미를 갖고 있는 이름이다.
성경에서는 사람의 이름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를 설명하는 경우가 많이 나타나는데,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 인것 같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 입성의 마지막 관문인 여리고성 주위를 언약궤와 함께 일곱번 돌고 뿔 나팔을 불어 함락 시켰었다.
인간적인 방법이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방법을 통해 약속의 땅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을 무너뜨리신 이유는 '구원'은 결코 우리 인간의 노력과 지식으로는 도달하기도, 이해하기도 불가능 하다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웅변한 사건이었다.
같은 맥락으로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그림자로 설명하고 있었던 복음과 구원의 실체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 여리고 성을 들리신 것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소경을 불쌍히 여기셔서 눈을 뜨게 하셨다'라는 정도의 의미만이 아닌 것이다.
우리 교회는 이 사건을 통해 보다 본질적인 복음의 의미와 구원의 성취에 대해 깨달아야 한다.
구약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 것 처럼, 우리의 구원은 복음의 실체이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어야만 가능한 것이며, 그로 인해 더이상 (죄, 고난, 풍랑의 )바다도 없고, 눈물이 없는 새 하늘 새 땅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구원과 복음의 실체가 예수님임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이다.
바디매오는 예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쳤다.
- 불결한 자의 자식들인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님께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쳐야 한다.
사람들은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더 큰 소리로 예수께 매달렸다.
- 세상이 복음을 비웃고 신자들을 조롱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더욱더 큰 소리로 예수께 매달려야 한다.
드디어 예수께서 그를 부르시자, 그는 유대인들이 생명 처럼 여기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께로 왔다.
-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셨을때 우리는 나를 포장하는 세상적인 가치를 모두 버리고 예수께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은혜로 눈을 떴을때 그는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다.
-그리고 예수님의 은혜로 온전한 복음을 믿는 믿음이 생겼을때, 우리는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서야 한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 우리 모두는 '불결한 자의 자식"이었다.
자신의 존재적 죄인 됨을 회개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하신 것을 믿은 자만이 오직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복음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예수님을 몰랐던 시절이나 현대사회에도 여전히 예수님의 존재를 모르는 소수 부족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라는 질문은 '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라는 거부의 표현일 뿐, 복음을 전해 듣지 못한 이들을 향한 궁휼한 마음이나, 사랑에서 비롯 된 걱정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복음의 실체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곁을 지나고 계신다.
그 복음에 반응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사정을 변명으로 늘어 놓는다.
조금만 더 거룩해지면, 이번 건만 해결하면, 요번 건만 해결되면...등등
마치 주인이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교회의 거룩한) 혼인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했을 때, 먹고 사는 문제를 이유로 모두가 거절하자 (하나님) 주인 마음대로 영문도 모르는 아무나를 혼인잔치에 데리고 오신 비유와 마찬가지의 상황이 오늘도 주변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지옥과 천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사랑이신 하나님과 관계없이 "영원"을 산다는 것을 상상해 본적이 있는가?
시간의 틀에 갖힌 우리에게 영원이라는게 어떤 의미인지 알수 있을까?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제대로 보고 이해할 수 있는 눈과 귀가 생겼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신앙이 생긴 것이다.
믿음이 아닌 관념속의 이해와 추측은 우리에게 넉넉한 마음을 준다.
거기에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모두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원수마귀의 속삭임은 너무나도 달콤하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을 좇는 삶을 묵상하지도, 대수롭게 여기지도 않는다.
좋은게 좋은 거다.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전해 들은 우리 신자들은 당당히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무거운 짐을 들어 주시는 분이 아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깨달으면 짐을 가볍게 여길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증인의 삶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적인 복을 받고, 세상적인 모든 문제가 해결되며, 세상에서 우리를 높히기 위한 모든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은 모두 거짓말이다.
온갖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어라!!
이 모든 것은 원수 마귀의 속삭임이다.
세상에 선행을 베풀고 학교나 병원이나 빵 공장을 지어준다고 그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단순히 고맙게 여길 뿐이다.
자신의 필요가 해결되면 그들은 다시 세상속으로 돌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결코 회심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의 기쁜 소식은 오로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께만 주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죄 속에 갇힌 그들이 듣기 싫어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소식을 선포해야 하는 증인인 것이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내어놓을 유일한 믿음의 행위이다.
[기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죄인들의 마음 가운데 찾아오는 은혜를 간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결심이 아니면 우리는 모두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이 안 계시는 끔찍한 지옥을 영원히 살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부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에게 구원의 소식을 깨달을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