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묵상할 말씀]
요한복음 21장 1절~25절
[요절]
18 :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너의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묵상]
요한복음 묵상을 마치는 날이다.
요한복음 묵상을 통해 그 동안 잘 몰랐었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많이 알게 되었다.
"하나님 아버지와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여, 세상이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게 하라!!" 는 말씀을 지금 당장은 이루지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 사랑을 나누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리고 어제 예배 후 성경공부 시간에 반 형제와 나누었던, 성도들이 반복적으로 짓는 죄 문제와 도덕적, 윤리적으로 완벽히 변해가야 하는 게 성도의 올바른 삶인지? 그리고 죄 짓다가 마지막 순간에 영접하면 그만 아니냐?는 이야기들이 오버랩 되었다.
복음..복음..기쁜소식..Good News..
도대체 복음이란 무엇인가?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창조주 하나님을 거부하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전능자가 되고 싶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 그로 인해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 된 삶을 살게 된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값없는 은혜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을 통해 나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인생의 구세주로영접하면, 죄에 대해 심판하지 않으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셔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이 아닌가?
요한복음 묵상을 통해 내가 깨닫게 된 것이나, 어제 김무성 형제가 궁금해 했던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적용 되야 하는 교회 안까지 인간의 역사를 통한 윤리적, 도덕적 기준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생각이 든다.
복음 하면 떠오르는 단어와 의미들이 있다.
"예수님, 십자가, 보혈, 말씀, 믿음, 소망, 사랑, 의, 선한 삶, 거룩, 하나님 나라..."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노력과 열심과 상관 없이값없이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수시로 망각하는 것 같다.
물론존재적 죄인인 우리가 원수마귀의 종 노릇했던 옛사람의 행습으로 인해 자꾸만 까먹는 경우도 있지만, 진리의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교회가 자꾸만 성도들의 거룩한 삶과 변화된 모습을 강조하고 마치그것이 성화 인 것처럼 가르치기 때문에 성도들은 마음에도 없는 거룩함과 도덕적,윤리적 겉모습을 보이기 위해 전전 긍긍하게 되는 것이다.
주일마다 양복을 입은 무당이나 도덕 선생님처럼, 강대상에선 목회자들이 성도들의 거룩과 선한 행위만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군대에는 맞아야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뭐가 돌아간다는 것인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군대가 정해 놓은 획일적인 기준에 맞추어가는 게 잘 돌아 간다는 의미인가?
그렇다..
거기에다 상관의 명령에 복종시키는 방법으로도 탁월한 방법이기 때문에 사람이 돌아버릴지라도 군대는 계속 돌리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군대뿐이 아니다 규범이 필요한 여러 종류의 단체에서도 목적 달성을 위한다는 명분아래 사람의 다양성과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행해지는 일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가?
교회의양적 규모적 크기의 팽창만을 강조하는 교회는 성도들의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자극하여 헌금과 전도와 봉사를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본다.
도대체 복음이 왜 이렇게 변해버린 것인가?
예수님께서 도덕적, 윤리적으로 완벽한 성도가 되어야 이 땅에서 복 많이 받는다고 하셨는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최소한 이 정도의 거룩과 선한 행동이 필요하다고 하셨는가?
오늘 본문의 제자들은 어떠한가?
예수님과 3년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직접 목격하고, 말씀으로 특별 과외(?)까지 받은 그들이 아닌가?
그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까지 아무런 능력이나 권능을 보이기는 커녕, 말 못하는 양 처럼 죽으시고 부활 한 사실을 목격한 후 어떤 행동을 보였었나?
예수님의 제자라는 신분이 자신들에게 어떤 피해를 줄지 몰라 뿔뿔이 도망간 그들이 아니었는가?
더군다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아니었는가 말이다.
기껏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필요인 물고기를 많이 건지게 하는 표적을 보이시자 비로서 "아! 나의 예수님이시구나!" 하고 깨달은 그들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조상들 치고 인간적으로 죄와 허물이 없었던 사람을 찾기가 힘들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롯, 야곱, 요셉, 다윗, 솔로몬.....사사기에 등장하는 판관들...열왕들...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
그들은 오랜 시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경험하며 자신의 죄성과 허물을 발견하였고, 그나마도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 인해 진정 회개하고 믿음의삶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보지 않은 것을 믿은 나 같은 성도들은복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여전히 도덕적, 윤리적 선한 행위의 영적 가면을 쓰고 바리새인처럼 살아야 하나? 성경말씀에 통달하여 넘치는 지식을 남에게 알리고 강요하는 제사장처럼 살아야 하나?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값없이 주신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 아버지의은혜이며,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이 내놓는 어떠한 노력, 행실, 열심, 결심, 계획과 상관없이 심판하지않음과의롭다고 여기셨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구원받은 성도들은 구원 받은 이후의 삶을 통해,그리스도인 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하지 않는 자신의 죄성을 발견하고, 또한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세상적인 권력과 풍요의 덧없음을 깨달아,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 더러운 죄인을 구원해 주시는 겁니까? 라는 것을 배우고 깨달아,
아! 정말 나의 허물과 죄와 어리석음을 보지 않으시고, 전적인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 구원 받았구나!! 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을 통과한 성도들이 자발적인 선함과 도덕적, 윤리적 삶이 완성 되는 것이지,
"구원 받았으니 뭔가 보여봐!!, 내 놔 봐!!"
"구력이 몇 년이냐? 이 정도는 해야 되는 거 아냐?"
"신유, 치유, 방언, 헌금, 봉사의 열심이 구원 받은 표시야!!"
"너는 아직도 왜 이러니? 나처럼 변해봐!!"
"무슨 교회가 이래? 말씀에 힘이 없네? 은혜가 안돼!!"
"예수님 믿었느니 세상에서 성공해야 하는 거 아니야??"
"예수님 믿고 세상 고지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불신자가 교회로 모인다!!"
"기도, 찬송은 부르짖어!! 열심이 부족하잖아, 구원 받은 거 맞아?"
이러한 세상적인 가르침은 교회의 모습이 아니고, 복음을 더럽히는 가장 큰 죄악인 것이다.
오죽하면 예수님의 수제자라는 베드로 조차도 젊어서는 베드로 마음대로 반복되는 죄 속에서 살겠지만 결국에는 베드로의 존재적 죄인 됨과는 상관없이 절대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여 자신을 산 제사로 드리는거룩한 순교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예언하셨을까?
신앙의 마지막은 내가 완전히 부인되는그 자리, 나는 죽고 예수님만 드러나는 가장 낮은 자리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어느 교회에 실제 있었던 이야기다.
그 교회에는 죽는 날까지 술을 못 끊고, 술에 취해 길에서 객사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장례식을 집도한 목사에게 어느 성도가 말했다.
"목사님, 술하나 못 끊은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아 천국에 갔다고 말씀하십니까?"
"형제님, 저 분이 죽기 일주일 전에 고백한 말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이렇게 변하지 않는 죄인을 아무런 조건도 없이 구원해 주셨다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사랑과 은혜가 무엇인지...복음이 왜 기쁜 소식인지 이제야 알겠네요.."
주님의 성전인 몸을 술로 더럽힌사람은 성도가 아니라는 발상이 바로 원수마귀가 이 세상을 통치하는 방식이다.
과연 술과 담배를 끊어야 성화의 삶을 사는 것인가?
그렇다면 짜고 매운 음식을 먹는 사람, 카페인이 가득한 커피를 마시는 사람, 인스턴트 음식을 탐하는 사람,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 목숨을 걸고 위험한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 몸을 잘 안 씻어 더러운 사람, 몸의 병을 방치하는 사람... 이들은 거룩한 주님의 성전인 자신의 몸을 온전히 위하고 있는 사람들인가?
술 못 끊고 죽은 성도와다를 게 무엇이 있는가?
다 같은 죄인이면서 누가 누구를 정죄하고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강도 중 누가 구원 받고 누가 구원 받지 못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는 그 성도의 계획과 노력에 의해 거룩해지거나 하나님의 종으로 쓰여지지 않는다.
구원을 값없이 받은 것처럼, 소명 또한값없이 찾아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남의 눈을 의식하거나, "이 정도는 해야 내 체면이 선다" 라는 식의 선한 행동과 도덕적, 윤리적 행위는 나의의를 드러낼 뿐이다.
평생을 선하게 살다 죽은 간디와 평생을 범죄 속에 살다 예수님의 오른쪽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이름 모를 죄인 중 누가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들어갔을 지를 생각해 보자.
본문의 베드로 역시 그토록 예수님을 부인하며 제 멋대로 살겠지만, 결국 예수님을 증언하다 순교할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지, 베드로의 계획과 노력과 열심으로 거룩한 순교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 성도는 지금 당장 죽어서 지옥의 유황불에 떨어져도 아무런할 말없는 죄인임을 인정하고, 이런 죄인중의 괴수인 나를 영원한 죽음과 지옥에서구원해 주신 그 사랑과 은혜를 매 순간 경험하며, 주님의 계획과 인도하심 대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게성령 충만한 삶이다.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원했던 방언과 치유와 기적의 표적을보이시거나, 성도들의 세상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교회의 양적 부흥을 이루어 주는 것이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하여 성령님을 선물로 받은 성도들은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님에 의해죄와 의와 심판과 복음에대해 깨닫게 된다.
성도들의 존재적 죄인 됨을 깨닫고, 그 죄 가운데 있음에도 여전히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약속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라고 주신 광야의 시간, 이 세상의 삶, 우리가 겪는 문제와 고민들을 거꾸로 성령님에게 해결해 달라는 게 무슨 성령충만이며,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이며, 나를 부인하는 십자가의 삶이란 말인가?
[기도]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복음이 왜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지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복음이 우리 성도들과 불신자 모두에게 진정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구합니다.
아직도 자신의 죄인 됨을 회개하지 못하고, 내 몸처럼사랑해야 할 하나님과 이웃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죄 가운데 있는 저와 형제, 자매들을 기억하시고 우리 죄인들이 올바른 복음을 통해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해 주세요.
사랑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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