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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시간

2012년 2월1일 [성경이 도덕적 윤리적 삶의 지침서인가?]

전도사님께서 수양회 주제를 삼으신 산상수훈과 야고보서를 묵상하다가 문득 '성경이 도덕적 윤리적 삶의 지침서인가?'라는 의구심이 생겨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우주 천지 만물과 모든 인간을 창조하신 거룩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원 전에 계획하셨고, 이미 완성 된 하나님과의 영원한 삶(천국, 하늘나라)에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거룩한 존재인지? 그렇지 못한 존재인지?에 대해 우리 스스로 이 역사라는 묵시의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존재적 죄인 됨을 깨달아 보라는 말씀과, 하나님 절대 의존적으로 살아야 할 우리가 스스로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고 우주의 중심은 ‘나’라는 자기 의존적 삶을 사는 태도가 죄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이 죄로 인하여 우리는 부끄러움과 걱정과 두려움이라는 죄의 속성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이 죄의 속성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남보다 위에서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늘 미래를 걱정하면서, 그럴듯한 외모와 재물과 물질에 대한 끝없는 욕심을 부리는 세상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죄의 중노릇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선악을 판단하면서도 남을 정죄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걱정과 두려움에 빠지지도 않는 존재는 하나님 이외에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성품과 능력을 가지신 분을 천지의 창조주와 우리 삶의 아버지로써 유일하신 분 ‘하나님’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로만캐톨릭과는 완전히 다른 종교인 것입니다.


또한 성경 말씀을 통한 자기의 존재적 죄인 됨에 대한 깨달음은 내 삶의 태도와 방향이 바꾸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지옥불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깨달음을 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고, 그 지옥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믿고 순종하며 사는 방법 이외는 없다는 것을 알게 해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우리의 노력과 열심과 행위로는 절대 구원을 위한 의에 이르지 못하니,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로 촉발 된 십자가의 은혜만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내라는 말씀을 일관되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죽는 순간까지도 이 세상에 속한 죄인일수 밖에 없는 우리가, 우리의 죄인 됨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면, 우리를 더 이상 정죄하지 않고 의롭다고 인정하심은 물론, 더 나아가 거룩한 신분이 되어,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천국 백성이 되었다는, [영원이라는 시간속에서 먼지보다 작은 이 세상의 삶 앞과 뒤에는 영원한 하늘나라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신] 기쁜 소식을 알게된 우리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고 고마운 나머지 정성이라는 답례를 해야 할 까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의 열심과 노력이라는 행위의 정성을 보실까요?
마음의 중심을 보실까요?


이 부분에서 특히나 윤리적인 역사와 풍습에 길들여진 우리민족은 복음의 본질에서 쉽게 벗어날 개연성이 많습니다.
새벽달아래 정한수를 떠놓고 온갖 정성을 드리던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신에 의해 창조 된 우리 모든 인류는 예배자입니다.
21세기의 문명속에 있는 민족이나 신석기시대를 살고 있는 아마존의 민족이나 모두 신에 대해 예배를 드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자의 중심에 흠이 있는지와 없는지 그리고 예배의 대상이 누구냐가 영원한 천국의 삶인지? 아니면 영원한 지옥의 삶인지를 결정하는 절대요인이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예배는 받으시지만, 자기의 이익을 위하거나 행습을 위한 예배는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삶이 천국이라면, 하나님이 없는 영원한 삶은 지옥입니다.
내가 예배 드리는 대상이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로 인해 영원한 삶의 질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는 것은 복음이기도 하지만,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후회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 은혜를 의지하는 순종의 삶에서 기인하는 선한 행위는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과 같이 철저한 낮아짐의 상태를 요구합니다.
이렇듯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자신을 높이기 위해 자신의 노력과 열심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강한 우리의 본성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임 말씀을 통해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믿음과 순종에 근거한 행위가 없음 또한 진정한 신자의 삶이 아니라는 것도 말씀하십니다.
이렇듯 우리가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거룩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수 있기에 합당한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순전히 삼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로 인함이지, 우리의 노력과 열심과 행위는 단 한 점의 기여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노력과 열심과 행위로 거룩하게 될 수 있다면, 예수님의 피는 헛된 것이며, 거룩하고 전능하신 공의의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노력을 담보로 영원한 삶을 약속하셨다면, 이는 결코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거룩과 의롭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거룩과 의로움이란 전 우주를 통털어 유일하게 거룩하고 의로운 존재이신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행하심을 말합니다.
기껏 창조한 인류를 물로 쓸어 버리시거나, 이집트 민족에게 열가지 재앙을 내리시거나, 순종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로 수만명을 죽이시거나, 가나안의 거민들을 몽땅 죽이라고 명하시거나,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것이나, 아무 죄없는 간난 아이들을 수만명 죽게 하신 것 모두가 우리 인간의 가치로는 이해할수 없는 사건들이었지만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것은 거룩하고 의로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받는 길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을 믿음과 감사와 순종으로 따를때[인간 스스로 행하는것이 아닌, 티끌 만큼도 자기의 의가 포함되지 않은] 하나님께서는 그를 거룩하다, 의롭다고 여겨 주십니다.
인간적인 기준의 도덕적 성품과 선행을 연상했다면 이는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귀가 막힌 상태이며,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어쩌면 세상권세에 눌려 사는 우리의 현재 모습일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예수님을 믿게 된 제자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결과 살아가게 될 삶에 대한 선포이지, 이 세상을 윤리적, 도덕적으로 살아가라는 지침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서도 여전히 나의 능력과 가능성과 가치 챙기기를 의지하고 있으니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게 되는 것이고, 이러한 나의 죄인 됨을 발견하게 되면 될수록 우리는 회개하며 예수님의 온유함과 의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 된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 평생 율법을 지키시면서, 아무런 소유를 가지지 않으시고, 전능한 신으로서 높임을 받기는 커녕, 오직 죄 가운데 있는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고난과 설움과 배반과 아픔과 외로움을 견디시고, 가장 낮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삶을 원하는 것일까요?


침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외쳤던 같은 말씀을 시작으로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누구에게 회개하라고 외치셨을까요?
그 당시 누구보다 종교행위에 열심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이웃을 돕는 선행과 거룩한 삶을 살고 있었던 바리새파 사람들과 제사장들에게 위선의 가면을 쓴 독사의 자식이라고 수없이 욕을 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신 것이 지금의 우리와는 관계가 없는 말씀일까요?


유명한 힌두교 신자인 간디는 그의 제자들과 매일 매일 산상수훈의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간디는 진정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낸 것일까요?
그는 경건과 무소유와 비폭력 저항이라는 방법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는 세상적인 필요를 구하였습니다.
폭탄을 둘러매고 자살테러를 감행하는 무슬림들은 죽음이라는 극단의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과 남은 가족들의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복을 구합니다.
우리는 인간성 회복이라는 기치 아래 점점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 시켜보자는 수많은 불신자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팔고, 자신을 희생하여 구제와 봉사를 합니다.
과연 그들이 하나님과 하늘나라의 의를 구하는 의로운 삶, 착한 행실을 하는 것일까요?
평생을 무소유와 선행을 설파하다 죽은 법정이라는 중과 김수환 추기경이 하나님과 하늘나라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긍정의 힘과 능력에 의지하라는 조엘 오스틴이나, 다양한 종교로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오프라 윈프리와 조용기 목사는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세상의 성공을 구하는 것일까요? 자신의 의를 높이고 이름을 드러내고 싶은 욕심이 전혀 없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과 의와 복과 착한 행실은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만 결론이 나야 참이며 진리입니다.
먼지만큼이라도 나의 이익과 의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생각이 들어있다면 이것은 진리의 복음이 아닙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예수님을 개인적인 구세주로 만나기 전까지는 세상적인 복과 가치를 구하기 위해 이 세상을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가치의 기준이 하나님과 하늘나라의 의를 구하는 삶으로 변한 순간 저는 지금 당장 지옥에 던져 버려도 할 말 없는 죄인의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깨달음도 예수님의 은혜였고, 그 지옥 같은 형벌에서 벗어 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도 예수님의 은혜 외에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로 처음에는 종교적 열심과 마음의 뜨거움과 온유함과 낮아짐도 잠시지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저는 저의 성화는 커녕, 여전히 죄인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죽을 때까지 그 죄의 습성이 남아 있을 거라는 절망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교회는 성도의 마음에 임하신 성령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삶을 통해 천국을 누리라고 하는데, 저는 변하지 않고 여전히 남아있는 저의 자아와 이익 챙기기, 미래에 대한 두려움, 남의 이목에 신경 쓰기등 옛 죄인의 습성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세상의 삶이 천국인지, 지옥인지 큰 혼란 속에 빠져 있습니다.
질병과 삶의 고단한 문제를 통해 점점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의 교만과 가치 챙기기를 점점 버리게 하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지만 그것도 그 때 뿐입니다.
당시의 죽도록 힘든 어려움이 지나면 또 다른 어려움을 스스로 자초하고 있는 저를 볼 때마다 저는 저에게 점점 실망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을 떠난 공허함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매일 매일 경험하는 저는 그래서 늘 괴롭습니다.
과연 이 삶이 천국의 삶인가요?


그렇다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저를 왜 이 세상에 살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다고 하면서도 저의 이익 챙기기와 가족들의 건강과 세상적 성공과 세상이 주는 물질적 풍요와 문화적 안락함을 구하는 삶을 경건과 거룩이라는 가면을 쓴 채 살아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저의 중심은 세상적 가치와는 상관없이 온전히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며 늘 감사와 찬양하는 삶을 거부하고 있음이 밝혀진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애써 못들은체 하고 있습니다.
"떠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저에게 떨어질 날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고, 두려워 합니다.
하나님과 하늘나라의 의를 감당하기 싫은 게 현재 저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러나 저에게 희망은 있습니다.
“주님, 여전히 죄가운데 지옥의 삶을 살고 있는 나약하고 어리석기만 한 이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살려 주세요.
온전히 주님만 의지하는 하늘의 복을 주세요!!”
저는 늘 이렇게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만 믿고 순종하면, 저 천국으로 갈수 있다는 하늘나라의 소망을 믿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의 팔복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삶이 모욕과 박해와 비난이 될 것이라고 선포하셨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서 세상의 가치를 구하는 우리를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무시하고 개독교라고 부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는 빛으로 인해 우리의 무기력함과 어리석음과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수시로 폭로 될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의 말씀을 알고 있지만 나만을 사랑하는 저의 존재가 갑자기는 물론 성화라는 과정을 통해 완전히 바뀔 것이라는 기대를 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는 저와 우리를 의롭다 인정해 주신 은혜만은 죽을때까지 믿고 위안 삼을 것입니다.
'아니야, 나는 예수 믿고 의롭게 변했어...'라고 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 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의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난 술과 담배를 끊고 성내는 것도 많이 줄였어, 나는 음란에서 점점 자유로워 지는 것 같아…’
‘은퇴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선교의 계획을 가지고 있어..’
이러한 간증은 나의 건강을 챙기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내 것 다 챙기고 남는 시간에 해보려는 후순위 과업이거나, 나이가 들어 마음이 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저의 존재적 죄인 됨이 수시로 폭로될 때마다, 이를 슬퍼하고 괴로움과 절망을 또 한번 경험하겠지만, 그 연단의 과정을 통해 예수님의 의와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은 진정한 성화의 길이며, 그 은혜에 감격해서 통곡할 수만 있다면 저는 그 은혜에 만족합니다.


아직도 예수님 믿고 나는 변했으니 나의 열심과 노력과 선행으로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계속하십니다.
매우 역설적이지만 시내산의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예수님께서는 더욱 지키기 불가능 한 수준으로 끌어 올리셔서 우리에게 지킬것을 요구하십니다.
저는 매일 매일 나의 거룩한 신랑 되시는 예수님 몰래 세상적인 가치와 돈, 즉 우상신을 섬기는 간음을 하고, 나의 이익에 해가 되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며, 수시로 분노하고, 내일 먹고 살 것을 걱정하며 남의 이목을 의식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가 살길은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지킬 수 없는 불가능한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조명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이미 내재하고 계시는 성령님더러 어서 오시라고 하는 간구는 가끔 귀신을 불러내는 무당이 연상 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 우리는 성령님을 이미 선물로 받았습니다.
우리의 자기 가치 챙기기로 인해 내 안의 성령님이 소멸하지 않게 해달라는 간구는 정말로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꾸 우리 안의 성령님을 오시라고 하는 것은 성령님을 우리의 간구나 소원을 들어주는 마술램프의 요정으로 여기는 게 아닌가 해서 조심스럽습니다.
어쨌던 성령님을 구하는 우리의 삶은 좁은문, 곧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모래위에 지은 집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모두 마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하십니다.
도대체 길고 긴 산상수훈을 마치시는 마당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행하라는 것일까요?
세상적인 도덕과 윤리에 기초한 착한 행실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나와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전세계를 변화시키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 의존적 삶을 살지 못하고, 자신 조차 변화 시키지 못하는, 우리의 존재적 죄인 됨을 깨닫고, 철저히 나의 가능성을 포기하는 "나를 부인하고 나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혹시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에 힘입어서 이세상을 천국 처럼 변화 시키고, 영원히 이 세상에 살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세상에 맞서 굴하지 않고 투쟁하며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과연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것일까요?
나의 의와 이세상의 가치를 구하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도토리 키재기하는 죄인들의 무리인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는 못할 망정 투쟁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제 이웃에 살고 있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입니까?
아니면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지 못하고, 스스로 고아 된 우리인가요? 아니면 거룩한 남편 되시는 예수님을 세상이라는 우상과 바꾸어 버리고 스스로 혼자 된 과부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알아보지 못하고 이곳 저곳 복 준다는 무당 종교를 기웃거리는 나그네 인가요?
혹시 내가 고아이자 과부이자 나그네는 아닐까요?
하나님의 자녀인 존귀한 신분의 나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데 좋은 영향을 끼쳐 보겠다며고 뛰쳐 나갈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가 능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알아챌 수 있는 증인이 될 수 있지만, 세상사람들은 복음을 듣더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전혀 깨닫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제자들의 삶이 세상으로부터 모욕과 박해와 비난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의 세상적 욕심을 챙기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너희들이 싫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가 바치는 제물도 이제 나는 받지 않겠다.....자녀가 아버지에게로 마음을 돌이키지 아니하면 내가 가서 이 땅에 저주를 내리겠다." 라는 말라기 말씀이 성취된다면 우리는 살 소망이 전혀 없는 죽은 목숨입니다.
그러나 나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은혜만 의지하고 순종한다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끝으로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유대인의 관습으로 아버지가 죽기 전에 아들이 재산을 요구하는 것은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는 행동으로 아주 큰 죄라고 합니다.
이런 못 된 아들은 마을사람들이 돌로 쳐 죽여도 법적으로 죄가 아니라고 합니다.
동네 사람들이 알게 되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재산을 나누어줍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포기했기 때문일까요?
어쨌든 세상으로 나간 아들은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모든 돈을 탕진하게 됩니다.
우리도 알고 있는 세상의 이치에 따라 돈 떨어진 아들은 철저히 세상에서 버림을 받게 됩니다.
결국은 유대인이 돼지라고 비하하는 이방인의 종 노릇까지 하게 됩니다.
아무리 세상의 가치를 취하기 위해 이방인의 종 노릇까지도 서슴지 않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아들에게는 절망 뿐입니다.
드디어 절망의 끝이 되어서야 아들에게 소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집을 부인하고 나의 힘으로 성공해 보리라며 관계를 끊었던, 그럼에도 돌아갈 집과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본 후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떠올린 것입니다..
자기의 의가 완전히 무너진 순간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난처합니다.
동네로 돌아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발각되는 순간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절박한 상황이 아들을 아버지의 집으로 향하게 합니다.
아들이 동네에 도착했을 때 아들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동네를 떠나는 순간부터 언제 이 아들이 돌아와 마을 사람의 돌에 맞아 죽게 될지 몰라 매일 매일을 동네 어귀에서
아들을 기다렸던 아버지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행위로 그가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은혜로 살아난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 아들을 살리기 위해 세상으로 아들을 보냈습니다.
아버지의 은혜를 떠난 삶이 얼마나 처참한 것인가를 배우라고 뼈아픈 결단을 하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천국을 경험하고 있다면 아직은 아버지의 집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옥을 경험하고 있다면, 고난이 축복이라는 것과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달으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 가운데 있는 것일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