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할 말씀]
디모데후서 1장 15절~2장 13절
[요절]
9 : 나는 이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죄수처럼 매여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여 있지 않습니다.
[묵상]
고난이 없는 그리스도인을 상상해 봅니다.
만일 세상적으로 부족한게 하나도 없다면 과연 하나님을 찾게 될까요?
2011년, 세계적 거부의 반열에 오른 삼성그룹 총수 부부가 원불교의 해외 포교에 쓰라고 120억을 기부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돈만 믿는 줄 알았는데, 원불교라는 종교를 통해 돈을 신앙하고, 자신들의 안위를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 또한 예수님의 사랑이 필요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들입니다.
우리 인류는 하나님을 떠난 이후로 언제나 불안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력인 바라크, 복을 떠났으니 당연한 결과 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누군가를 의지하고, 구하려는 습성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예배자 입니다.
그러나 과연 누구를 예배하느냐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땅 끝까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알고 있으나, 창세전에 선택된 신자들 외에는 사랑과 희생의 십자가 복음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다양한 종교가 난무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신자의 삶과, 자연의 현상을 통해 그리고 우리 모든 인간들의 마음속에 뿌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씨앗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십자가의 복음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는 존재들이 있다는것은 선택과 선택되지 않음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이르키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면서, 왜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거냐?'
이런 질문에 신자들은 당황하게 되는데, 실은 당황해 할게 하나도 없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신다면, 그 사랑에 응답하고 그 사랑을 받아 드리세요. 그래야 당신은 구원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으신다면 인정하고 받아드리세요.'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복음을 누구나 받아드리지 않게 우리를 만드셨는지 나는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선택하지 않고, 왜? 나를 선택하셨어요? 라고 호기있게 주님께 묻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 추악한 세상에서 나를 끄집어 내셨다는 것이 그 무엇 보다도 나를 감격케하고 감사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결코 배타적이거나, 독선적이지 않습니다.
겉으로 경건한 척하고 행위로 엄청난 선을 베푼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중심을 보고 계십니다.
다른 종교는 우리 마음 중심에 있는 죄의 뿌리까지 모두 회개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정진하고 착하게 살면, 선과 의와 거룩과 구원에 이를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노력과 행위로는 결코 내 중심에 도사리고 있는 원죄를 없애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처리하는 방법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는 길 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겉모습을 거룩하게 한다고 해도 내 마음속, 내 중심은 언제나 죄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이 진리를 사람들은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만일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힘없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알아, 무시하고 억압하려 들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힘의 원리가 다스리는 세상적 가치로는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대신, 자신을 증명하려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너무나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 속으로 말이죠...
율법으로 구원에 이르는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구약 내내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 복음은 '우리의 존재적 죄인 됨을 회개'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변하지 않는 자신의 존재적 죄인 됨을 회개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믿을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처럼, 사랑하는 아들을 이 세상속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살아있는 아버지의 재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크나큰 불효로 동네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죄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다가 돌에 맞아 죽을까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마을 어귀에서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우리 신자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버지는 우리의 사랑을 실증하시기 위해 목숨보다 사랑하는 자식들을 이 세상의 고난속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게 된 신자들 또한 배신과 외로움과 비난과 조롱과 매 맞으며 살다가 결국은 십자가에서 죽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살다가 죽어야만 부활하게 됩니다.
본문의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다 감옥에 갖혀 온갖 고난을 받은 것 처럼, 그럼에도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멈추는게 아니고, '너도 이러한 고난을 받게 될 것이지만, 기쁜 마음으로 이 고난을 이겨내라'고 권면하는 것은 이 세상의 고난이 복음이 주는 평안과 비교할 수 없는 작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죄수처럼 매여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여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인한다면, 그도 우리를 부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형상으로 창조 된 것 처럼, 우리는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믿음과 복음을 알게 하신 것은 우리 마음속에 뚫고 들어오신 하나님의 은혜지만, 이 복음을 지키고 그로 인한 고난을 인내하며 감사와 찬양을 올리는 것은 우리 신자의 몫입니다.
불신자들은 자기 손으로 만든 우상에 절하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절합니다.
[기도]
고난이 축복임을 알게 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비록 복음으로 인해 겪는 고난이 힘들게 여겨지지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비하면 '없음'임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사랑의 은혜에 힘입어 우리 교회가 이 세상을 예수님 안에서 기쁜 마음으로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비록 고난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예수님안에서는 그 고난이 은혜임을 깨닫는 우리 교회가 되도록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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